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문단 편집) === 낙마와 위기 === [[쿠르수스 호노룸]]을 밟은 카틸리나는 기원전 65년 집정관직에 출마하려 했으나, 속주민들이 권력 남용으로 기소한 탓에 재판에 회부되어 집정관 입후보 시기를 놓쳐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재판은 무죄가 되었지만 집정관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다음해에도 집정관에 출마했지만,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밀려서 낙선하였다. 이 때부터 '채무 전액 강제 탕감'이라는 과격한 공약을 내걸기 시작했다. 이 공약은 원로원 체제의 경직과 수구화가 유발한 격심한 빈부격차와 만성채무의 늪에서 신음하는 영세 자영농들과 몰락귀족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지만 법에도 명시할 만큼 사유재산권을 신성불가침으로 간주했던 대부분의 로마시민들에겐 냉전기 [[공산주의]] 만큼의 어그로가 끌렸다. 더욱이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은 빚을 도저히 못갚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었고 반대파들은 법에 명시된 채권자의 권리 사수를 위해 결사항전을 불사할 태세였으므로 양측간 분쟁은 극한으로 치달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산자들은 담보로 잡힐 재산도 없어서 카틸리나를 지지하지 않았다. 기원전 63년에 세 번째로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으며 이번에도 채무 전액 강제 탕감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3등에 그쳐서 낙선했다. 그런데 이번에 선출된 집정관 가운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하고, 무레나의 유죄가 확정되면 카틸리나가 집정관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시류를 읽은 당대의 스타 변호사 [[키케로]]가 나서서 무레나를 변호하여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바람에 카틸리나는 또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선거를 하려면 막대한 돈을 써야 했고 이 돈은 빚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틸리나는 3번에 이르는 낙선으로 막대한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카틸리나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